제목: 안중근 장군 탄생 130주년을 맞이하면서
1879년 9월2일 지금부터130년전 바로 오늘 황해도 해주 수양산 기슭에서 우리의 위대하신 성웅 안중근이 태어났다.
안중근의 아명은 응칠이었다. 배와 가슴에 일곱개의 검은 점이 있어 응칠(應七)이라 부른 것이다.
내가 보기에 안중근 장군은 원태생부터가 칠성장군으로 태어나신 것으로 보인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안인수(安仁壽)인데, 성품이 어질고 무거웠으며, 일찍 진해 현감을 지낸 선비로서, 살림이 넉넉했을 뿐더러 자선가로서도 도내에 이름이 났었다고 한다. 그 할아버지의 6남 3녀 중 셋째인 태훈(泰訓)이 진사벼슬도 하시고 할아버지의 가장 총애하는 천재셨다고 한다.
우리 속담에 '내리사랑'이라고, 어느 자식 안 귀한 자식이 있겠냐마는 자식 중에도 특별히 정이 더 가는 자식이 있게 마련이고 그런 자식의 '새끼'는 그야 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가 아니겠는가. 그 사랑스러움을 어찌 말로 다 표현 할 수 있으랴.
더구나 응칠은 태훈의 3남 1녀중 맏이였으니, 응칠에 대한 조부의 애정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겠다.
필자에게도 얼마전 두 돌을 지낸 손자 놈이 있어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응칠이 노는 거동 좀 보소.
사냥총을 메고 말을 몰아 산과 들판을 헤매다니기가 일수였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마시고 취해서 노래하고 춤추는 '망나니 짓'을 여사로 하면서 소년 시절을 보냈으니, 그 부모의 심사가 결코 편할리가 없었다. 아무렴 친한 친구들도 이를 보다 못해 응칠의 행동을 꾸짖으며 고쳐보고자 했을까.
그러나 소인이 어찌 대인의 웅지를 알 것인가.
대붕의 뜻을 어찌 연작(까마귀 까치)이 알 것인가.
응칠이 자연을 사랑하며 가무 음주를 좋아하며 열혈 남아답게 정의를 논하고 친구 사귀기를 좋아하는 그 모습은 과연 누구의 모습인가. 그 행동은 과연 무엇을 말해 주는가에 대하여 우리 한번 냉철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응칠이 비록 나이 어리지만 그의 본연의 자세는 다름 아닌 우리 동이민족의 홍익인간하는 민족정신의 발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 민족의 원래의 생활터전은 한반도가 아니었다. 한반도에 칩거하여 막다른 벼랑끝 생애에 허덕이는 막장신세가 아니었다. 말을 몰고 광활한 중원대륙을 질풍노도처럼 누비던 기마민족이었다.
천사처럼 흰옷을 입고 밝고 맑음을 즐기는 백의민족이었다.
이웃끼리 서로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며 평화를 즐기던 평화민족이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불쌍한 자 약한자를 도와주기를 당연시 하던 홍익인간이었다.
일본이 과거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강보에 싸여 의식주 문화혜택을 누리고 외세로부터 국방을 도모해 왔음은 바로 이러한 한민족의 홍익인간 정신때문이었다.
단군조선 배달조선의 통치원리는 침략주의 승자독식이 아닌 햇볕정책과 이웃사랑이 무력으로 승화한 홍익인간의 원리였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는 말은 바로 우리 안중근 장군의 어린 시절 응칠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응칠의 일거수 일투족이 우리 배달민족의 홍익인간 정신의 발로가 아닌 것이 어디있었던가?
그리고 마침내 일본의 이토오히로부미가 그 전형적인 왜놈 근성을 발휘하여 독아를 치켜 세우고 1905년 한반도를 물어 뜯었을 때,
조선왕비 민비를 자객의 칼로 난자하고 조선에 진입해서는 조선왕조의 군대도 해산하고, 외교권을 박탈해서는 역대 조선의 문전 옥답이던 만주 땅 간도를, 권한도 없이 건방지게, 철도부설권을 받아챙기고 남의 땅을 제 땅인양 청국에 넘겨주고, 급기야는 중국 대륙을 송두리채 빼앗아 차지하려는 제국주의 침탈행위에 착수하자, 동이민족의 후예 평화의 기수 우리 안중근 장군이 의병을 조직하여 적장 이토오히로부미를 척결코자 평화파괴의 원흉 이토오를 척살코자 민족의 선봉장으로 나선 것이다.
아니 우리 대한제국과 중국 뿐만이 아니라 베트남 3국을 위시한 전 동양의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평화의 수호자로서 안중근 장군은 평화의 순교자요 평화의 희생양을 자청하여 인류를 침략의 만행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거룩한 목숨을 바친 것이다.
안중근 장군의 이러한 거룩한 정신에 오죽이나 감동을 받았으면 당시 여순감옥의 간수장이던 일본인 찌바도오시찌 헌병 상사가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여 안장군의 '옥바라지'를 했으며 장군님 사후에도 3대에 걸쳐 영정을 모시고 불단에 예불을 드렸겠나.
안장군님의 이러한 평화사상은 우리 민족 고유의 홍익인간정신의 발로다.
안장군님의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그의 모든 진술과 붓글 유품과 일본인 뿐만 아니라 외국의 수많은 방청객들이 목격하고 증언하는 바에 따라 그는 태어날 때부터 어린시절을 거쳐 31세의 짧은 생을 마감할 때 까지 시종일관 여일하게 오로지 인류의 평와와 공존만을 위해 분골쇄신 하신 분으로 기억될 것이다.
아직까지 안타깝게도 장군님의 시신은 여순감옥의 뒷산에 매장된 채 고국으로 모셔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 장군님 탄생 130주년을 맞이하여 장군님의 동상이나마 고국으로 모셔올 수 있게 되었다.
대한 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님의 동상은 그 당시 거사 현장 하얼빈역 광장에 세웠던 것이다.
바로 그 동상을 우리나라에 모셔오게 되었다.
지금까지 남한에 세군데에, 그분의 사진으로 미루어 조각한 동상이 서 있긴 하나 지금의 이 동상의 의미와 같을 수는 없다.
지금 모셔온 이 동상은 안중근 장군님의 생전의 평화애호와 구국의 충혼이 가장 절실히 서린 모습이기 때문이다.
안중근 장군님의 모습을 한 두가지 사진으로만 파악하려 들지 말라.
거사 후 일본 헌병에 잡혀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의 그 수척하고 피폐한 모습을 재현하려 들지 말라.
우리는 서울 남산의 입장권 사진을 통해 보아온 그 분의 모습을 흠모하고 존경해 왔다.
바로 그 사진의 실물 동상이 우리 앞에 실제로 오신 것이다.
2009년 9월2일 이날은 참으로 감격스런 날이 아닐 수 없다.
이제 한 걸음더 안중근 장군님의 앞에 다가 갈 수 있게 된 것 같아 무척 기쁘다.
이를 위해 수고하신 안중근청년아카데미에 박수갈채를 보내는 바이다.
우리는 오늘 이날을 안중근 장군님 알리기 운동의 기폭제로 삼자.
이날을 맞아 앞으로 우리 한민족의 홍익인간 정신을 대한민국 전역과 세계 만방에 널리 알리고 북한의 모든 지도자와 동포들에게도 널리 알리자. 그리하여 안중근 장군님의 유지를 세계만인의 가슴에 깊이 새기자.
안중근 장군님 동상 모시기 운동은 바로 이러한 민족정신의 고양 운동이 되어야 할 것이다.
2009년 9월2일 길원 남태욱.
최근 덧글